나치에게 명화를 넘긴 화가, 그가 그린 빅피처

2차 대전이 나치의 패망으로 끝난 직후 미군은 오스트리아의 알트하우스 호스 근처의 소금광산 갱도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발견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나치의 예술품 빼돌리기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어릴 적 화가를 꿈꾸기도 했던 히틀러는 미술품에 대한 욕심이 컸다. 나치는 문화재 수집 특수부대 ERR(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까지 조직해 점령지의 미술품을 약탈하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구입했다. 미술품들은 원래의 소장자들에게 반환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장의 작품이 다수 발견됐다. 그중에서 베르메르의 작품도 있었다.
 
네덜란드 당국은 나치에게 국보급 미술품을 (팔아)넘긴 매국노를 수사하다가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을 체포했다. 나치의 총사령관 헤르만 게링에게 베르메르의 그림을 밀반출했다는 이유에서다. 메이헤런은 재판에 넘겨지자 베르메르의 그림은 자신이 위조한 가짜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그가 국가반역죄라는 중범을 피하기 위해 위조범이라는 가벼운 죄로 위장하려는 것이라며 허튼소리 취급했다. 베르메르 같은 거장의 작품을 그림이나 팔아먹는 화상(畫商)이 감히 똑같이 그릴 수 있겠는가와 더불어 예리한 미술 감식가의 눈을 어찌 속일 수 있겠냐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가 위작이라고 주장한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은 위작조사위원회가 감정한 결과 진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보통은 위조범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전문감정가들이 가짜임을 밝히는데 이 사건은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난감한 재판부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메이헤런에게 모두가 보는 재판정에서 그림을 그려보라는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려보라” 
 

  
이리하여 재판정에서 증거를 만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막상 그가 붓을 들자 그림 실력이 보통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적어도 표현의 테크닉만큼은 거장의 수준에 달했다. 여론은 갑자기 파렴치한 전범에서 나치를 농락한 의적으로 변했다.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럴싸한 영웅으로까지 비쳐졌다.

그가 위작 화가로 나선 계기는 복수였다. 델프트공대 건축가를 나온 그는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다시 아카데미에 들어가 미술 수련을 했다. 나름대로 화가로서의 실력은 갖췄지만 그의 화풍은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가 신봉하는 고전적 기법은 20세기 초 유행하는 모더니즘과 거리가 있었다. 아니 거리가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닥다리 취급당했다.
 
그가 보기에 과장된 자의식, 비정형적인 도상, 이미지의 파편 등으로 화장한 모더니즘은 일그러진 문명의 그림자였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 이름부터 괴상망측하지 않은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모더니즘이 진정한 미술인양 떠들어대는 비평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잡지 <투계(鬪鷄)>를 발행하여 그야말로 싸움닭처럼 주류 비평가와 화단을 공격했다. 그들의 허위의식과 횡포를 고발하고 관념적 허영과 권위의식을 비판했다. 그럴수록 그는 주류 미술계에서 점점 더 소외당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기로 맘먹었다. 그들의 권위의식과 허위의식을 한 방에 날려버릴 통쾌한 복수를 꾸민 것이다.
 
모두를 속이다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권위자이자 베르메르 작품에 관한 최고 감정가이다. 그가 베르메르의 작품에 연대기적으로 공백이 있는데 알려진 종교화 작품이 너무 적은 것으로 보아 향후 새롭게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메이헤런은 브레디우스의 글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메이헤런은 꼼꼼하게 준비하고 차근차근 착수했다. 베르메르의 스타일과 표현 기법을 익히는 건 물론이고, 어떡하면 그림이 300년 전 것처럼 보이도록 할 것인가도 연구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캔버스를 구해서 당시 화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스케치하고 베르메르가 사용했다는 붓과 똑같은 것을 구해 연습했다. 그림에 색칠한 후 화학약품을 사용해 세월 속에서 바래진 것처럼 바니시를 변색시켰다. 그런 다음 열기를 쬐어 바싹 말리고 가죽 공을 그 위에 대고 굴려 균열이 생기게 했다. 마지막으로 갈라진 틈에다가는 검은 잉크를 채워 넣어 세월의 흔적을 넣었다.
 
메이헤렌은 위작 기술을 완성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그는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을 브레디우스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박사는 감정서를 제출하면서 ‘세기의 발견’이라고 극찬했다. 메이헤런은 화상으로 변신한 다음 몇 개의 위작을 더 만들어 유통시켰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네덜란드 예술협회도 그의 위작을 베르메르 작품이라며 구입을 했고, <엠마오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네덜란드 최고가를 기록하며 로테르담의 미술관에 버젓이 걸리기도 했다.
 
위작이 성공을 거두자 메이헤런의 생각이 달라졌다. 화단 권위자들의 위선과 저급한 안목을 까발려 통쾌하게 복수하고 나아가 부조리를 혁파한다는 대의(大義)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짭짤한 수익에 입맛을 다셨다. 지폐를 세는 손맛에 공분(公憤)은 공중분해 된 것이다. 메이헤런은 본격적인 위작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재판으로 밝혀진 위작 사건으로 인해 학계와 평단의 권위는 추락했다. 그의 복수는 성공했다. 그러나 복수의 성공이 개인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인정받았지만 그의 행위까지 죄를 면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도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위조 사건의 주인공으로만 회자되었다. 그는 1947년 재판이 끝난 직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메이헤런의 역설
 

  
엄밀히 따지면 그의 작품은 위작(모조품)이 아니라 페이크(fake) 작품이다. 유명 그림을 모사한 게 아니라 (17세기 바로크 시대) 유명화가의 화풍을 모방하여 새로운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기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작품이 창작과 모사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그의 부조리는 그림을 대가의 작품으로 속이고 거기서 사적 이익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부도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조리를 비웃기 위해 시작한 일에 자기 스스로 부조리에 빠지는, 그리하여 자신도 비웃음 당하는 ‘메이헤런의 역설’이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낭만적 이야기만으로 치부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메이헤런은 속임수를 써서 돈을 번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찬사를 받기에는 그의 행적에 부도덕한 측면이 많다. 화단 권위자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까발리는 것에만 그쳤다면 그는 소박한 영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 발 더 들어갔다. 이것이 그를 의인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다.
 
하지만 그를 파렴치범으로만 몰 수 없는 뒷얘기가 있어 여운을 남긴다. 메이헤런은 위작 판매로 큰돈을 벌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젊고 궁핍한 화가들을 발굴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메이헤런의 후원 덕분에 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유럽 최고의 화가로 추앙 받고 있는 대가도 몇몇 있다. 메이헤런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젊은 화가들을 찾았고, 그들을 후원했다. 부디 자신과 다른 길을 가기를 소망하면서. 여기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진부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경구가 떠오른다.
 
덧붙이자면 메이헤렌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다. 소설가 우광훈의 <베르메르 vs 베르메르>다. 시대와 불화하는 천재라는 모티프를 아주 멋지게 그려낸 작품으로, 우리나라 작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럽이라는 공간과 20세기 초중반의 시대적 상황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이 뛰어난 작품이 왜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지 못했는지 개인적으로 몹시 의문이 든다.

관람객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 했다.”

인상주의를 지칭하는 진술로 들릴 수 있겠지만 미술사가 노베르트 슈나이더가 베르메르를 두고 한 말이다. 또한 앙드레 말로는 베르메르의 작품에 대해 “예술사에서 최초로 그림의 주제가 상상의 대상이 된다”라고 했다.
 
토레 뵈르거를 비롯해 19세기 말에 베르메르를 재발견한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베르메르는 회화적 구성에서 동시대와 다른 기법을 선보였다. 복잡한 구조를 몇 개의 요소로 단순화시키고 자연스런 빛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자에도 다양한 색채와 톤을 부여했다. 이와 같은 독특한 회화기법은 그를 독보적인 미학을 구현한 화가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작품을 표현미학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그의 구상적 측면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베르메르에게 주제나 모티프는 결코 부차적이 아니었다.
 
앙드레 지드가 찬사로써 한 말이지만 (베르메르 그림의)주제가 상상의 대상이 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서사적인 요소가 배제될 위험이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에서 사회적·문화적 연관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인물이나 사물 그리고 공간의 연출에서 일정한 양식을 창조했다.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면과 우유를 따르거나 책을 읽는 등의 개별적 행위가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본질적 특성이다. 그것은 동시대 홀란드 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당시 홀란드 회화는 황금시대에 걸맞는 활기와 약동이 회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진취적이었고 개방적이었고 관용적이었다. 의뢰인은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할 때 자신의 진취적 기상이 드러나길 바랐다. 그 기상의 이면에 스며있는 과시도 은근히 드러나길 원했다. 이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화가가 고수라고 여겼다.

베르메르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평상심을 유지하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 부산함, 긴장감, 흥분 등과 거리가 멀다. 특히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무표정하다. 감정이 제거되었다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조절하는 듯하다. 그래서 작품 속 여인들을 보면 절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고 해석하고 싶게 만든다. 상상과 해석이야말로 관객과 예술 작품이 교감하는 통로이다. 그 통로를 배회하며 관객은 자신만의 심상을 창조한다. 좋은 예술은 타인을 창조의 세계로 이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우리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주고 해석의 건축물로 안내한다. 그가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화가로 남은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끝으로 베르메르와 청색의 관계다. 그의 작품 중 <진주 목걸이>, <편지를 읽는 여인>, <연애편지>, <우유를 따르는 여인>, <레이스 짜는 여인>, <물병을 든 소녀>, <포도주 잔을 든 여인> 등 스무 점 가량에서 청색을 볼 수 있다. 그의 청색은 경이롭다. 작품 속에서 양감과 질감 모두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색이어서 베르메르를 대표하는 색이 되었다.
 
그런데 청색은 또한 델프트의 색이기도 하다. 베르메르가 사용한 청색은 울트라마린이고 델프트라에서 유행한 청색은 코발트블루이다. 코발트블루에 얽힌 델프트 블루, 이제 그 깊고 푸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