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드 호수 당일치기 여행, 내가 왜 이런 선택을

슬로베니아에 여행을 온 이유, 블레드 호수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류블랴나 역에 가서 블레드(Bled) 가는 기차도 알아보았지만 기차도 많지 않고 승객도 거의 안 보여서 버스를 이용해서 가기로 했다. 류블랴나(Ljubljana)에서 블레드 가는 버스는 이용 편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블레드 호수(Blejsko jezero, Bled Lake) 가까운 곳에 승객들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블레드 호수로 가는 버스터미널은 마치 역 앞의 버스 주차장같이 생겼다. 별도의 승하차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주차공간 위에 승차장 숫자와 행선지만이 표시되어 있다. 이곳이 블레드 호수 가는 승차장이 맞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많은 여행자들이 나와 아내가 서 있는 곳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래도 나는 한 슬로베니아 아주머니에게 이곳이 블레드 호수 가는 승차장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였다.

블레드 가는 2차선 도로. 울창한 숲 사이로 이어지는 길에 희미한 안개가 신비하게 계속 따라왔다. 블레드에 도착하자 나는 우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블레드 섬에 들어가는 정보를 먼저 알아보았다.

블레드 섬까지 들어가는 데에는 작은 배로 25분 정도 걸리고 섬에서 40분 정도 머무른 후 돌아오니까 총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먼저 이 블레드 섬에 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였더니 아내가 배가 고프다고 한다. 둘만의 자유여행, 나는 계획을 바로 변경했다. 우리는 블레드 성(Blejski grad, Bled Castle)에 올라가서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나는 인포메이션 센터 남쪽의 블록을 돌아 내려가면서 처음으로 블레드 보수를 보게 되었다. 나는 블레드 호수를 보면서 오늘 류블랴나로 오후에 돌아가는, 블레드 무박 여행 계획이 얼마나 후회스러운 것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쏟아지는 호수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블레드 성에 올라가는 언덕길은 표지판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성까지 이어지는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블레드 성을 향해 걸었다. 어깨 너머로 블레드 호수의 푸른 물빛이 넘실거렸다. 잠시 등산로를 걷다가 보니 산길의 작은 언덕 중턱에서 쥬프니즈스카 세르케브(Župnijska cerkev sv. Martina)라는 격조 있는 성당이 나타났다.

이 성당은 이미 천년 전에 예배당이 세워지고 15세기에 고딕 양식 성당으로 세워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당 천장 위 샹들리에서 내려온 따뜻한 황금빛이 성당 전체를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최고의 카라라(Carrara) 대리석으로 제작된 바닥은 깔끔하고 반질반질했다.

오전의 성당 내부에는 성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예수의 모습이 담긴 프레스코화도 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내는 자기가 유럽에서 보아온 성당 중 이 성당이 가장 성스러운 느낌으로 가득한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언덕 뒤쪽으로 난 작은 산길을 따라 다시 절벽같이 솟은 길을 올라갔다. 산길 왼쪽으로 드디어 블레드 호수의 숨막힐 듯한 전경이 드러났다. 알프스 인근의 여러 호수를 가보았지만 이곳 같은 절경을 가진 호수도 없는 듯하다.

아내는 성까지 가는 가파른 산길을 조금 힘들어했다. 우리는 중간에 쉬면서 천천히 절경을 감상하며 산길을 올랐다. 연신 감탄을 하며 15분 정도 산길을 오르자 120m 높이의 절벽에 자리한 블레드 성이 시야 전면에 나타났다.

최근에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블레드 성 입구에서는 한국어로 된 안내 팸플릿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성 내의 여러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한번 읽어본 후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선 후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한 곳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블레드 호수를 볼 수 있는 성벽 전망대였다. 절벽 아래에는 율리안 알프스(Julian Alps) 산맥을 배경으로 에메랄드 빛의 블레드 호수 전경이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전망 앞에서 모두들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에 점처럼 박힌 블레드 섬의 모습도 보기 좋게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려놓은 듯한 블레드 섬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멀리서 내려다 보아야 예쁜 듯하다. 이곳에서 보니 블레드 호수가 율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것은 상투적인 듯 하면서도 참으로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는 넋을 잃고 앉아 블레드 호수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우선 아래 정원에 있는 카페에 가서 크램슈니타(kremšnita)와 커피를 사왔다. 마음 급하게 성을 오르다 보니 아침 식사를 깜빡했던 것이다.
 

 
연두부 같이 부드러운 바닐라 크림에 페이스트리를 얹은 크램슈니타는 예상했던 맛보다 훨씬 달콤했다. 우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달콤한 크램슈니타 한 조각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마시는 커피 한 잔마다 블레드 호수를 내려다 보았다.
 

 
성 안 마당을 지나 성 내부로 들어가보니 성의 1~2층은 블레드 지역과 블레드 성에 관련된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박물관 안에는 선사시대의 암모나이트부터 석기 시대의 도구들, 철기시대의 복원인물상, 철갑옷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예상보다 많은 유물들을 보면 호수 주변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블레드인들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성 내부에는 슬로베니아 와인, 중세 활자인쇄 기념품, 벌꿀을 파는 가게 등 전통의 다양한 가게들이 슬로베니아의 특색을 자랑하고 있다. 여러 가게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대장간이다. 성 안마당에 여행객들이 모여들자 대장간의 한 대장장이가 전통방식으로 목걸이 펜던트 만드는 시범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여행객들이 해머를 들어 펜던트 재료를 직접 내려쳐서 자신의 펜던트를 만들도록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을 사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밝게 웃으면서 펜던트를 파는 그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성 안의 지하에는 유명한 대장간이 재현되어 있었다. 우리는 대장간으로 내려가서 이 대장장이가 만든 제품들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대장간에는 해머로 철을 두드려 가공하는 모루가 중앙에 준비되어 있고, 주변에는 이 대장간에서 만든 철제 벽걸이 장식품, 촛대 등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이 대장간에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슬로베니아 디자인의 저력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촌스러운 기념품은 쳐다보지도 않는 아내가 오랜만에 지갑을 열었다. 아내는 철 한 가닥으로 사람 형상을 표현한 벽걸이 장식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대장장이는 턱수염을 길렀지만 얼굴은 앳되 보인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장간을 했다며 사진을 보여주는 그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최근에 한국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방송되었다며 슬쩍 자랑도 한다. 한국 방송사에서 이 대장간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다시 방문하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는 자기가 만든 제품들을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안마당 벤치에 앉아서 그저 편안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 작은 여행가방을 벤치 앞의 갈색 원형 탁자 위에 올려 두었는데, 지나가던 관리인이 웃으면서 가방을 치우며 탁자 위를 보여준다. 탁자 위에는 중생대 바다에 살았던 암모나이트 화석의 나선형 껍데기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블레드 성 관리인은 이곳이 과거에 바다였다며 신비스럽지 않느냐고 했다.
 

 
꽤 많았던 단체 여행객이 모두 빠져나가자 성 안에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아직도 호수 뒤쪽의 사랑스런 마을에는 신비로운 안개가 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