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로는 최고였는데, 말할 수 없는 비극

한국 근대 서예 역사를 되돌아볼 때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서예가는 단연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이다. 그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쓴 것 뿐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더해 구태의연했던 기존의 서예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실제 그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인정받아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서예계의 일인자로 군림하였다.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며, 그의 특기인 ‘황정견(黃廷堅)’을 따른 필체는 당시 일세를 풍미하였다. 많은 동료 후배들이 그의 필체를 따라했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김돈희의 서예가로서의 행적
                   

 
김돈희는 전형적인 중인 출신으로 사자관(조선시대 승문원·규장각에 소속된 관원)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학과 글씨를 익힌다. 그의 집에는 선조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입수한 많은 서예 관련 서적들이 있어 이를 습득하며 글씨 세계를 넓혔다. 1887년 16세에는 법관 양성소에 입학하여 법률 서적을 가까이 하며 법관으로서 자질을 키우기도 했다.

20대에 관료생활을 시작하여 내각주사·조선총독부위원·금석문편찬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공직 생활을 끝낸 후에는 주로 서예가로서 활동하였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22년에는 4대 회장에 취임하여 한국 미술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김돈희는 개인 서예연구소인 ‘상서회(尙書會)’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을지로 단우(丹宇) 이용문(李容汶)의 집을 빌려 쓰다 경복궁 서쪽 근처 당주동으로 옮겼다. 김은호·노수현 등 서화미술회 학생들도 그에게 배웠으며, 훗날 걸출한 서예가가 되는 손재형과 화가 장우성 등도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김돈희는 일제의 문화정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작품 출품과 함께 서예부의 심사를 거의 도맡아 하였다. 1회에서 10회까지만 진행된 서예부에서 빠지지 않고 심사를 한 이는 김돈희 뿐이었다.

김돈희의 작품 세계
                 

 
김돈희는 글씨를 잘 쓴 것 뿐 아니라 남과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어 일가를 이루었다. 현존하는 작품을 보면 전·예·해·행·초를 모두 잘 썼는데, 특히 해서가 유명하였다. 해서는 안진경과 황정견의 서법을 혼용하여 썼으며, 북위시대의 글씨와 당나라 해서를 두루 연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예서는 한나라 예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하나, 실제 그의 글씨를 보면 누구에게 본받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만의 뚜렷한 색채가 있다. 그의 글씨는 문자를 구성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붓을 다루는 솜씨도 능란하여 획의 씀씀이가 매우 유려하여 보기에 좋았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황정견체’ 글씨는 오른쪽이 살짝 올라가는 느낌이 있어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든다. 이런 필체는 현판으로 제작하기에도 좋아 전국에 있는 사찰과 명문가에 많이 제작되어 걸렸다. 이러한 현판들은 모자란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보인다.

김돈희의 친일 문제

김돈희는 빼어난 서예 실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서예가로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친일’ 전력 때문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10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할 때 ‘한일병탄조약문’을 쓴 것이다. 그가 이 조약문을 쓴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불려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계의 주도적 인사로서 그러한 불명예를 피해가지 못한 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고, 한편으론 정치에 예속된 예술가로서의 숙명 같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또한 그는 한일병탄 이후 중추원에서 근무하며 글씨 쓰는 업무를 맡았고,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도맡아 함으로써 총독부의 정책에 일조를 했다는 혐의도 제기된다.

이러한 김돈희 삶의 궤적은 그의 장기인 ‘황정견체’가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을 하였고,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관료들이 유난히 좋아하였다는 면에서 더욱 친일 인사로 몰리는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광복 이후 김돈희의 이름은 점차 사라져 갔고, 서예가로서 친일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성당 김돈희와 성재 김태석의 대조적인 모습
                                     

 
김돈희의 친일 문제가 논의되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살며 서예와 전각의 명인으로 살았으나, 한 사람은 중앙에서 또 한 사람은 극단적인 변방에서 살며 대조적인 삶을 살아 늘 비교되는 인물이다.

김태석 또한 중인 출신이며 김정희(金正喜)의 말년 제자인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의 문인이다. 30세에 궁내부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한때 평창군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35세에 궁내부 미술 시찰 위원으로 일본을 잠시 다녀온 뒤 바로 청으로 건너가 20년 가까이 중국의 인주국(印鑄局) 관원으로 활동한다.

중국에 있을 때 상해 임시 정부의 요원들과 가까이 지내 김구, 조완구 등 여러 명의 인장을 새겨 주었다. 김돈희가 중추원에 근무하며 일본인들과 가까이 지낸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귀국한 후 10여 년간 국내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해방이 되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아 방에서 소리치며 뛰어 나오다 넘어져 크게 다쳤다는 일화가 그의 성향을 말해준다.

김태석은 중국에 있을 때 중화민국의 임시 초대 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옥새를 새긴 것으로 유명했으며, 대한민국 국새 1호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 찍힌 인장들이 대한제국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자, 그 모각본을 제작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제호를 쓴 김돈희
                

 
김돈희가 서예가로서 민족에게 가장 보람된 일을 한 것은 아무래도 민족 신문으로 불렸던 동아일보의 창간 ‘제호(題號)’를 쓴 일일 것이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제호 디자인을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에게 맡긴다.

고희동은 고민 끝에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에서 착안하여, 하늘을 나는 두 선인(仙人)이 동아일보 제호를 떠받드는 형상을 구상해낸다. 문제는 그 제호를 누가 쓰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최고 서예가로 인정받고 있던 김돈희에게 부탁한다. 김돈희는 반듯한 예서(隸書)체 한자로 ‘동아일보 창간호’라 제한다.

가슴을 드러내고 하늘을 나는 선인들의 다소 파격적인 역동적 몸동작과 단정하고 힘 있는 김돈희의 글씨는 조화를 잘 이루었다. 한국적인 소재를 서구적 디자인으로 소화한 고희동의 디자인과 동양적 지성을 상징하는 서예가 만나 멋진 혼성을 이루어낸 훌륭한 구성이라 할 만하다.

김돈희의 서예사에서의 위치

김돈희는 근대기 서예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 실력 면에서도 최고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에 협력한 친일 인사라는 사실 또한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런 이유로 그의 글씨 솜씨에 비해 한국 예술계에서 그를 본받을 만한 서예가로 대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제껏 그에 대한 변변한 서예전조차 한 번 열린 적 없다.

그러나 실제 김돈희의 행적을 들춰 보면 그의 이름을 친일 행적과 함께 모조리 묻어 버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한국 근대기 서예를 논할 때 그를 빼놓고서는 한국 서예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수제자가 다음 세대 최고인 ‘손재형(孫在馨)’이고, 손재형의 수제자가 한글 서예를 발전시킨 ‘서희환(徐喜煥)’이라는 계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만큼 한국 서예사에는 김돈희의 체취가 듬뿍 배어 있다.

이렇듯 김돈희의 삶은 빛과 그늘이 교차된 이중적 모습을 보인다. 미술이라는 것이 사랑과 희망,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좌절, 고통을 담듯이, 미술사 연구도 빛을 보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늘진 모습도 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순하게 친일 서예가로서 홀대할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미술세계의 ‘공(功)’과 ‘과(過)’를 엄격히 따져, 한국 서예사의 본 모습을 이해하는데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