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앞두고, 아내가 남미에서 문자를 보냈다

저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삼도봉의 경상도 쪽 벽촌에서 자랐습니다.

고향의 할아버지는 논배미 몇 자락이 모든 희망이었습니다. 등유 몇 방울을 아끼기 위해 등잔불을 켜지 않고 저녁을 먹었고, 새벽 4시면 마당에서 헛기침으로 식구의 기상을 독려했습니다. 근면과 검약을 농사꾼의 생존수단으로 여기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달빛 아래에서도 논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지독한 노동을 발판으로 저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부터 도시에서 유학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만은 배움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가장 큰 염원이었습니다.

저를 몰래 도시로 보낸 아버지는 공부보다 농사가 최고라고 여긴 할아버지로부터 한 달이 넘도록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는 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말짱 헛것이라 여겼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당연히 절기를 알게 되고, 그 절기에 맞추어 열심히 일하면 절로 깨우치는 것이 공부라고 여겼습니다.

한 지붕 세 부모
 

 
제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건 40여 년 전 일입니다. 제 고향과 60여 리 떨어진 곳에서 자란 여자였습니다. 비슷한 곳에서 산 만큼 지역적 정서나 향수가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만나 여러 해 연애 끝에 혼인했습니다. 

결혼 후 저는 공부와 일, 방랑적 기질 탓에 국내외를 떠도는 시간이 태반이었습니다. 오직 아들에게 모든 것을 바친 부모님의 노후를 양로원에 의탁하지 않는 것이 제 소원임을,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혼인한 지 이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제사상을 잘 차리기보다 살아계실 때 더운밥 한 상이라도 더 올리고 싶어요.”
 
아내는 연로한 시부모님을 더 이상 고향에 계시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때 저는 일 때문에 서울에 사는 식구들과 떨어져 파주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기에 부모님을 모실 형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자기가 시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고 오고 싶다고 했고, 그 뜻을 당신들께 전했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아버지는 농한기인 “겨울에만…”을 전제로, 어머니는 “손녀와 손자가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아내의 뜻에 따랐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고 협소한 서울의 7층 아파트에서 아버지는 주변을 산책하는 낙으로, 어머니는 밤에만 겨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손녀와 손자를 보는 낙으로 서울의 감옥 같은 나날을 “즐겁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퇴근이 늦어져서 직접 저녁상을 차려드릴 기회가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3대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고 서로가 있어 안심이었습니다.
 
그즈음 홀로 생활하시던 장모님의 치매가 심해졌습니다. 아내는 처가 식구들과 시부모의 동의를 얻어 장모님을 서울로 모셔왔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세 부모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기운이 쇠한 할아버지, 기억이 온전치 못한 할머니, 치매인 외할머니와 같이 사는 일은 딸과 아들에게도 쉽지 않았습니다. 함께 정교하게 힘을 합쳐야 하는 전쟁 같은 나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추모하는 방식
 

 
세분의 부모님은 한 해 걸러 차례로 이승을 떠났습니다. 부모님들께 정성을 다해온 아내에게 제사상 부담까지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6번의 기제사를 아버지와 할아버지 쪽으로 합쳐 3번으로 줄였습니다. 
    
아내는 지난해 정년퇴직을 2년 앞두고 6개월 휴직을 택해 남미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난 설날(2월 16일) 새벽 2시경,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내일이 설이네요. 몇 시쯤 차례를 지내실지? 저도 그 시간에 맞추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모든 조상님들과의 인연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아직 남미를 여행 중이던 아내가 설날 차례를 몇 시에 드릴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차례에 참석할 형편이 안 되면, 저마다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간 가족을 추모합니다. 추모와 관련된 일정을 분담하기도 합니다.

일주일 전 아내가 양가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아내가 고향에서 돌아오면 추석이 임박한 것입니다. 저는 가을 추수가 끝난 뒤 행하는 문중 시제 때 방문합니다. 아내는 여전히 직장에 매인 상태고 저 또한 일에 속박 당한 탓에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아내와 함께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위한 차례상을 차립니다. 현재 저는 파주에서, 아내는 서울에서 따로 살고 있는데, 연휴에 맞춰 아내가 파주로 오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굳이 참석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여력이 안 되면 자신의 자리에서 마음을 모으면 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답게 추모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일하랴 살림하랴 바쁜 며느리를 애달아 하셨습니다. 시부모 상 차리는 수고를 막기 위해 며느리가 퇴근하기 전에 부러 잠자리에 들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며느리가 차례상을 준비하는 노동에서도, 차례와 관련된 각종 규범과 관습에서도 점차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요즘 아내는 짬짬이 북한산 자락을 걷고 있습니다. 70여km의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마을길뿐만 아니라 흙길과 숲길을 걷는 리듬을 익히고 있습니다. 내년에 퇴직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서울의 집에서 고향의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 산소까지 370km쯤 걸으며 노년을 어떻게 존엄하게 보낼지를 양가 부모님께 물어볼 계획이랍니다.

저는 아내의 이런 계획이 의례를 포괄하는, 또 다른 방식의 추모라고 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