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여성 혐오에 정면으로 맞서는 여성 게이머

심장 떨리게 쫄깃하면서도 무섭고,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도 풀리는 일명 총싸움 게임은 나의 수많은 길티 플레저 중 하나다. 올봄, 오래 기다렸던 총싸움 게임 2탄이 출시된 후 한동안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총을 쏘고, 죽고, 부활하고, 떨어지는 아이템을 줍고 다녔다. 하지만, 여성 게이머에 덧씌워지는 오명과 편견을 가장 잘 인식하는 사람은 바로 여성 게이머 당사자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게임 세계에서 총 쏘기나 멀티 액션  게임을 할 때는 조금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총 쏘기 게임에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길드(게임 내 친목 모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모인 이유와 목적이 나와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날 밤에는 정말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바로 유비소프트의 더 디비전 2(The Division 2) 공식 홈페이지에서 소개한 여성 게이머 전용 클랜(게임 모임) HGG(Hardcore Girl Gamers)다.
 

“HGG는 같은 게임을 사랑하는 여성들 몇몇이 일종의 ‘안전한 피난처’를 만들고자 시작한 클랜이에요. 애석하게도 여전히 그런 면이 없잖아 남아있긴 하지만, 어쨌든 주로 남성이 지배하는 비디오 게임 ‘세계’에서 그간 압력에 시달려온 게임계의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요. 

HGG는 The Division 커뮤니티에 우리의 족적을 남기자는 취지에서 탄생했어요. 사고방식이 비슷한 여성들이 편하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고, 현실 세계에서 이룬 성취와 게임에서 이룬 성취가 동등하게 축하를 받는, 그런 장소를 만들자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죠.

HGG는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자매단이에요. 개개인이 순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할 걱정 따윈 할 필요 없이 자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수 있죠. 여성도 커뮤니티 내의 남성들처럼 게임을 열성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해요.(Division 커뮤니티 팀, “클랜 집중 조명:HARDCORE GIRL GAMERS [HGG]”, 2019.4.23, tomclancy-thedivision.ubisoft.com)”
 
플레이어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악의 세력이 장악해 끝내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 뉴욕과 워싱턴을 지키는 비밀 요원 ‘더 디비전’의 일원으로서, 실력과 전술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HGG는 영어권 여성 전용 클랜이지만, 남성 게이머가 다수인 총 쏘기 게임에서 여성들이 편안하게 게임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게임 자체를 즐기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게임사의 의도를 100% 이해하고 콘텐츠의 품질을 가꿔 나가는 멋진 역할을 맡고 있다. 먼 나라의 자매들이 나처럼 즐겁게,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큰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멋진 여성 게이머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일반적인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역할과 의상이 2019년의 현실을 반영하는지 혹은 스토리와 플레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여전히 온라인, 모바일 게임 등 주요 장르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과 판이하게 다른,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고 있다.

게임 속 여성 캐릭터의 노출 문제는 오래전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2013년에는 Tika라는 게이머가 ‘여성 갑옷 고쳐 입히기(Repair her armor)’라는 텀블러(블로그와 SNS를 결합한 플랫폼)에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에서 입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여성 갑옷들’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시리즈가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듯 여성을 모성, 이성애 로맨스의 대상, 악녀라는 3가지 역할로만 취급하는 나태한 게임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는데도, 여성 게이머 인구가 늘고 있으며 그 누구 못지않게 콘텐츠를 즐기며 몰입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게임 산업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욱 다양한 연령과 성별을 반영하고 기존 정보에 규정 받지 않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사업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움직임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이고 구원받는 대상으로만 존재했고, 남성과의 관계가 곧 인물의 존재 이유를 규정했으며, 늘 승리나 성공의 보상으로만 취급받던 게임 속 여성 캐릭터도 조금씩 하나의 보편 인간으로서의 서사를 가져가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헐벗지’ 않은,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찾으려면 어떤 게임을 하는 것이 좋을까?
 
최초의 단독 여성 게임 주인공이면서도 육감적인 몸매가 부각돼 여권 신장을 저해하는 안티 페미니스트라고까지 불렸던  ‘툼 레이더(Tomb Raider)’의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도 2018년에는 여성 게이머가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로 변화했다. 2018년의 라라 크로프트는 드디어 핫팬츠를 벗고 탐험용 긴 카고 팬츠를 입는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후 서기 31세기, 현대 문명이 멸망하고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가버린 지구에서 실력과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의 영웅으로 성장하는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의 주인공 에일로이도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꼽을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에일로이도 짧은 조끼처럼 상체를 드러낸 옷을 입을 때가 있지만, 남성 사용자를 의식한 노출이 아니라 모피나 가죽으로 몸을 잘 보호한 멋진 의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미출시작 캐릭터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은 역시 동충하초 모양의 돌연변이 좀비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남은 ‘라스트 오브 어스’의 엘리다. 엘리는 용기와 결단력, 의지와 상대방에 대한 신의 등 지금까지 소년 영웅에게만 허락된 미덕을 모두 가진 캐릭터다. 빠르면 2020년,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서 육감적인 몸매도 노출하지 않고 헤테로 남성 게이머에게 어필하는 이성애자도 아닌 성인 엘리를 꼭 만나보고 싶다.
 

우리는 지금껏 남성 주인공이 승리의 대가로 공주를 얻는 류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제작사가 의도한 대로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운 취미이자 여가로 게임을 사랑해왔다. 앞으로 더욱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가 자유롭게 모험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더 많은 여성 게임 주인공이 주어진다면, 아니 우리가 그들을 얻어낸다면, 그때의 즐거움은 또 얼마나 클까?
 
그렇다면 더더욱, 게임 내 여성의 묘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욱 진보적이고 미래적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여성은 더욱더 강한 리더로, 또 전사로, 고유한 특징을 가진 대체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야 한다.
 
‘게임은 예술이자 여가인 동시에 주 고객층의 수요를 반영하는 상품이므로 기계적으로 어떤 이즘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게이머의 주장대로라면, 게임 속에는 더 많은 여성이 더 다양한 성격과 의지를 가지고 등장해야 한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면, 여성 캐릭터는 더욱 용감하고 지적이고 우수한 인물로 그려져야 한다. 치열하게 싸워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같은 여성 게이머와 연대하고 앞장서 길을 열어주고, 좋아하는 콘텐츠에 몰입해 울고 웃는 동시대 여성 게이머의 모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