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중국 건물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상해(상하이)-남경(난징)을 하나로 잇는 활동 무대를 구축한 시기는 윤봉길 의사 의거(1932년 4월 29일) 직후였다. 윤 의사 의거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국민들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일본 눈치를 보며 직접적인 지원을 꾀하지 않았던 장제스 국민당정부는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약산 김원봉이 1932년 가을 남경 외곽 황룡산 기슭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치하여 청년들을 교육하고, 백범 김구는 1933년 5월 장제스와 회담에서 한국인 군관 양성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는다. 그 결과 조선혁명간부학교, 중앙육군군관학교 남경 및 낙양분교 등에서 1938년까지 2백여 명의 우수한 군관을 배출, 독립을 위한 무장조직의 근간을 이룬다.
 
금릉대학 대례당에서 민족혁명당 결성
 

 
1935년 2월 1일 치 ‘동아일보’는 “(김원봉, 김구 등 민족운동의 거두는) 남경 육군군관학교 일부를 차용하야 군대식 교련으로써 투사를 배양하고 잇어 목하의 조선인 재학생은 제3기생 60명, 제4기생 40명이 잇어 제3기생은 충분한 교련을 실시하야 금년 2월 졸업한 후 만주 조선 각지로 밀령을 받고 잠입해 잇다는 정보도 있어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저 경무국은 물샐틈없는 경게진을 펴고 잇다.”라고 전한다.
 
그해(1935) 7월에는 김원봉, 김규식, 조소앙, 지청천, 신익희, 최동호 등 기라성 같은 독립지사들과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의열단 대표들이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대례당에 모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이 조직은 동맹연합체 성격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광범위한 통일전선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불참한다.
 
민족혁명당 조직체계는 중앙집행위원회 아래 서기부·조직부·선전부·조사부·훈련부·군사부·국민부 등을 설치하고 중국과 한국에 지부(支部)와 구부(區部)를 둔다. 1936년 초에는 화중·화남·화동·화서·화북·만주·조선 등의 7개 지부가 있었다. 강령은 민주공화국, 삼균주의, 토지 국유화, 대규모 생산기관 국유화, 민주적 권리보장 등을 삼았다. 기관지 <민족혁명>도 간행한다.
 
난징대학, 1888년 미국 선교사가 설립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넷째 날(4일)은 역사의 도시 난징의 중앙반점에서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호텔을 출발,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난징대학, 리지샹위안소 유적진열관, 조선혁명간부학교 훈련소였던 천녕사(天寧寺) 등을 돌아보고 항공편을 이용, 광저우(광주)로 이동했다.
 
이날 아침, 눈뜨기 무섭게 창가 커튼을 저치고 주변을 살펴봤다. 전날 밤 부자묘(夫子廟) 거리 야경을 감상하고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김종훈 기자가 “중앙반점은 1932년 5월 김구 선생이 장제스와 회담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그 호텔이니 애국지사가 된 기분으로 편히 쉬시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 한참 둘러봤으나 회담 장소인 총통부 건물은 확인하지 못했다.
 
버스는 난징대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현지 가이드가 오늘은 섭씨 32도까지 올라갈 거라 했다, 혹서의 계절도 아닌데 32도라니. 상하이, 충칭과 함께 중국 3대 화로(火爐) 도시로 꼽힌다더니 소문대로였다. 은근히 걱정됐다. 오후 스케줄에 천녕사 답사가 들어 있었기 때문. 천녕사는 오르막길을 20~30분 걸어야 한다는데 헉헉대지 않을까 미리부터 겁이 났다.
 
호텔에서 난징대학까지 소요 시간은 30여 분. 난징대학은 1888년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교명은 회문서원(滙文書院). 1910년 굉육(宏育)서원과 통합, 금릉대학당이 된다. 중일전쟁(1937) 와중에는 난민수용소가 되기도 하였고, 1952년 난징대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약산이 한 학기 마치고 만주로 떠난 이유
 

   

 
난징대학은 한국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유학한 많은 유학생 중 다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 몽양 여운형,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 서병호, 조동호, 김마리아 등이 대표적이다.
 
정문을 통과하니 가로수 터널이 나타난다. 쭉 벋은 중앙대로 끝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캠퍼스 전체를 돌아보려면 반나절도 더 걸릴 것 같았다. 해서 애국지사들이 수학하던 시절 감흥이 느껴지는 본관, 대례당, 역사박물관 중심으로 돌아봤다.
 
김종훈 기자는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친구들과 1918년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배경과 한 학기만 마치고 만주로 떠난 이유 등에 관해 설명했다.
 

 
“잠깐 설명해드리면 약산 김원봉이 이곳에 오기 전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에서 누구를 만나냐. 친구인 약수(김두전)와 여성(이명건)을 만납니다. 그래서 김약산, 김약수, 이여성… 산(山)처럼, 물(水)처럼, 별(星)처럼, 이 친구 세 명이 의기투합해서 온 곳이 여기 금릉대 영문괍니다. 그해가 1918년, 그러면 그 전에 약산은 어느 학교를 다녔냐, 천진(톈진)에 있는 덕화학당을 다녔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독일을 뭐라고 부르죠, 덕국(德國)이죠.
 
약산이 왜 중학교를 나와서 덕국, 덕화학당을 갔냐, 그때는 독일이 과학기술과 군사력 면에서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독일에는 못 가니까 덕화학당에 가서 신진문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갔던 겁니다. 그런데 한 학기 마치고 여름방학 때 고향에 왔다 가니까 학교가 없어졌어요. 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연합국에 가담했기 때문이죠.
 
고민하던 약산은 세계 흐름상을 다시 짚어봅니다. 이번에는 영·미권이 세계 흐름을 잡은 겁니다. 그래서 독립을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 중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 이 금릉대였고, 그중 영문과를 굳이 선택했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도 길게 다니지 못해요. 한 학기 마치고 길림성(지린성)으로 갑니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죠.”
 

의열단 활약, 옛날 신문에서도 잘 나타나

김종훈 기자에 따르면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폭탄 제조기술을 배운다.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 13명과 1919년 11월 9일 저녁 지린성(吉林省)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농부 반(潘)씨 집에 모여 광복이 되는 날까지 일제와 친일파들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 의열단을 조직한다.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에 추대된다. 이후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장 등을 지내며 대일 무장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김원봉은 김구보다 훨씬 높은 현상금이 붙을 정도로 일제가 두려워하는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활약상과 영향력은 옛날 신문 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아일보’는 1923년 4월 12일 배포한 의열단 사건 관련 호외(號外)에 김원봉 사진을 게재한다. 1924년 2월 7일 치 신문은 <김원봉 도일호(渡日乎) 삼중현 경찰부에서 대 경계> 제하의 기사에서 ‘중대 음모 계획을 세우고 부하 5명과 함께 일본 내지에 잠입했다는 소문이 있든 상해 의열단 김원봉(金元鳳)은 그 후 일본에 상륙하여, 관서선(關西線)을 통과, 삼중현(三重縣)에 잠복한 행적이 있으므로 삼중현 경찰부에서 엄중히 경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1930년대에도 <권총 가진 암살단 5명, 김원봉 밀명 받고 입만(入滿)>(1934년 3월 12일)/ <김원봉 지휘로 활동, 비행기 불하도 계획>(1935년 4월 9일)/ <남경 군관학교생 대거 만주로 잠입, 김원봉에게서 교란의 밀명 받고>(1936년 6월 9일) 등 약산 이름을 앞세운 신문 기사가 여러 꼭지 발견된다.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건물

김종훈 기자는 일행을 예당(전 대례당)으로 안내한다. 김 기자는 민족혁명당이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김구 선생을 위해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지만,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김구 선생이 끝까지 고사했던 일화 등을 부연했다.
 

   
“중요한 곳이 하나 더 있어요. 대례당, 지금의 예당(禮堂)이에요. 왜 여기가 중요하냐. 임시정부가 혼란기를 거칠 때 장제스 총통이 좌우 안 가리고 지원해줘요. 그래도 하나로 모이지 않으니까 뜻있는 분들이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1차 의열단사건’ 주동자였던 윤세주가 등장합니다. 8년 동안 감옥에 있던 윤세주 역할이 컸죠… 1935년 7월 드디어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지는데 그곳이 바로 예당입니다. 그 귀한 장소에 여러분들이 오신 겁니다.”
 

김 기자 설명을 듣자니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지근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관람했다. 초창기 학교 건물을 비롯해 혁명열사들, 1920년대 학생들 축구경기 모습, 중일전쟁 때 폐허로 변한 도시, 국공내전 시기 학생들 시위 등 난징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많았으나 해석이 어려운 한자로만 설명하고 있어 아쉬웠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일행은 약산이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지나 당시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앉아 나라의 명운을 걱정하고 미래를 꿈꿨을 시원한 정자에서 숨을 고른 뒤 리지샹위안소 유적 진열관으로 이동했다. (계속)